원종수 박사 간증서 '너는 내 것이라' 간증 中

<저자소개>
-1951년 대전 출신
-4남매 중 막내 독자
-아버지는 수송부대 대위로 복무하다 6살 때 임종
-어머니는 과부로 삯바느질, 식모로 남매를 키운, 매우 독실한 새벽기도 용사
-고2 때 하나님께 완전기억력(포토그래프 메모리)을 받고 350등으로 떨어진 성적을 단번에 올려서 서울대 의대 진학 후 수석졸업, 1975년 의사고시 수석




1967년 11월 말, 얼음이 얼기 시작했다.
방에 물을 떠놓으면 그냥 얼어버렸다.
냉바닥에 조그만 화로를 피워 가운데 놓고 저녁도 굶은 채 담요를 둘러쓰고 '내일이면 죽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잘 아시는 전도사님이 갑자기 와서 '죽더라도 예배는 드리고 죽읍시다'라고 하셨다.
전도사님은 성령 받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지금 죽어서 천국에 가면 새 교복 입고, 새 책 냄새나는 새 교과서도 갖고, 고기랑 흰 쌀밥도 실컷 먹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 말씀도 잘 듣고, 그렇게 나쁜 짓 하지도 않았고, 교회에 열심히 나갔는데.. 그런 것 가지고는 천국에 갈 수 없다니..
이렇게 고생했는데, 결국 지옥에 가야 한다니 너무 억울했다.
하나님과 결판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학교에 다녀와서 전도사님 댁을 찾아갔다.
전도사님은 나를 방바닥에 눕혀 놓고 머리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해 주셨다.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일들이 생각났다.
밤에 참외밭에 가서 주인에게 말 안 하고 따 먹은 것, 밥 먹을 때 배고파서 기도 안 하고 그냥 먹은 것, 학교 변소에 돌을 던져서 여자 선생님을 놀라게 했던 일..
나는 이미 잊어버렸던 일인데 하나님께서 다 기억나게 하셨다.
바늘도둑이나 소도둑이나 죄는 같다.
다른 사람 상하게 하고 마음 아프게 한 일이 없는 것 같았지만, 작은 일까지 하나님께서는 모두 기억하고 계셨다가 생각나게 하신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인데도 어머니 따라가서 철야기도, 새벽기도 하지 않고는 못견디는 마음을 주셨다.
나라, 지도자, 친구, 어머니, 우리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다보면 네, 다섯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그렇게 한달 동안 새벽기도 하는데, '종수야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마음에 들리는 음성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솔로몬처럼 해보자 라는 생각에 '지혜 주세요. 그렇지만 돈도 잊지 마세요.' 라고 했다.
하지만 누가 와서 내 머리를 탁 쳐서 지혜란 게 확 들어올 줄 알았는데 아무 소식이 없었다.
'하나님도 싱거우셔라.' 모처럼 오셔서 말씀하시고는 아무 표적이 없으시다니..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음을 얼마 있지 않아 알게 되었다.




1968년 1월, 어머니께서 어떤 장님 할아버지를 모시고 왔다.
할아버지는 교회 가는 길목에 떨고 앉아 계시던 분인데 어머니가 그 앞을 지나시면서 망설이다가, 그 날은 너무 추워 얼어 죽으실 것 같아서 지팡이를 잡고 데려오신 것이다.
나는 너무 기가 막혀서 어머니께 생전 처음 화를 냈다.
어머니는 엄숙한 말씀으로 할아버지를 씻기고 옷을 갈아 입히고 잘 섬기라고 하셨다.
할아버지의 그 오줌 똥 떼가 범벅이 된 옷과 몸에 손대기 싫어서 막대기로 옷을 벗기며 막 구박하기도 했다.
나한테 한 벌밖에 없는 내복을 입혀드리면서 솔직히 내 마음에 기쁨은 하나도 없었다.
혼자 앉을 만한 조그만 아랫목마저 할아버지에게 뺏기게 됐다.
하지만 그 할아버지가 우리집에 온 이후 나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할아버지가 온지 일주일 후,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 오서 성경을 펼쳤다.
로마서였는데, 16장까지 단숨에 다 읽어 버렸다.
그런데 로마서 말씀의 페이지가 머리속에서 넘겨졌다.
상가 건물 2층에 붙어 있는 간판이 로마서로 보였다.
그 당시 내 성적은 480명 중 300등 정도였다.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셔서 성적표를 보여주시는데 이번엔 350등이라고 하셨다.
교무실을 나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트럼펫 분다고 밴드부에 왔다 갔다 했는데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공부만 하기로 작정했다.
공부하던 중에도 할아버지가 화장실 갈 때, 세수할 때 시중을 다 들어드렸다.
1968년 2월, 고2 2학기 기말고사 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전 같으면 시험지 받아놓고 한숨만 쉬었을 텐데, 이번에는 시험지를 받아놓고 눈을 감으니까 갑자기 로마서가 떠오르듯 국사책이 머리속에서 한 장 한 장 넘어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험 결과가 나왔다.
전교생 480명 중에서 5등이었다.
졸업할 때는 전교 1등을 했다.

할아버지에게 된장국에 보리밥 따뜻하게 드리니까 맛있게 잡수시며 만족해하시던 할아버지가 진정 예수님이셨던 것을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미시간 대학에서 깨달았다.
1986년 한국 유학생 집회에서 강의를 해달라고 해서 학생들이 모여 있는 큰 홀 우측 뒤에 앉아서 기도했다.
"저 학생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그때 문득 스쳐가는 장면들과 '너는 이것을 이야기하라.' 는 음성이 들렸다.
필름처럼 다섯 장면을 보여 주실 때 이 거지 할아버지는 제일 첫 장면이었다.
내가 할아버지의 더럽고 이가 들끓는 옷을 억지로 벗기면서 구박하던 모습이었다.
"종수야, 그 사람은 바로 나였다."
"종수야, 내가 배고프고 춥고 떨고 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모습으로 성경 찬송을 들고 새벽기도 하러 교회로 내 옆을 지나가더구나.
그 중에서 아무도 나를 아는 척도 안 했고 가끔 어떤 이들은 동전이나 지폐를 던져 주고 갔지.
그들 마음속에 누구를 모시고 살고 있으며 어떤 기쁨이 있었는지 알 수 없구나.
그들의 손에 생경책이 들려져 있었으나 내가 춥고 배고플 때 나를 돌아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더구나.
그렇지만, 네 어머니가, 어제 저녁도 죽이 모자라서 자식들에게 한 숟가락 더 먹이고, 굶기를 밥먹듯 했던 네 어머니가 내 지팡이를 잡고 너희들 방으로 나를 인도하더구나.
그때 나는 너희 집이 궁궐 같았고 가나안 같았다.
푸른 초장이고 따뜻한 봄날 같았다."
"너희 가정에 배고품이 없게 해주마."
"예수님 감사합니다. 부족했던 이 죄인을 용서해 주세요."




서울대 의대에 입학해서 주위를 보니 서울시장 아들도 있고 서울고, 경기고, 경복고 출신들이 많았고 나이도 내가 제일 어린 것 같았다.
학교에 간지 한달 반쯤 됐을 때 보건소에서 통지가 날아왔다.
고 2때부터 나타났던 증상을 치료하지 않았기 때문에 X ray에서는 나의 폐는 이미 결핵 2기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육신이 약해지니 세상에 낙심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신입생 시절이라 철학에 심취돼서, 그동안 내가 믿었던 것도 다 헛것이었던가 의심이 들었다.
'어떤 친구들은 자가용 타고 다니고, 조금도 궁색함이 없어 보이는데 왜 나는 이렇게 불행할까.'
1969년 5월, 물리과 4층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다가 갑자기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리를 난간에 걸었다.
막 뛰어내리려는 순간 어머니 얼굴이 보였다.
내가 죽어서 가마니가 덮여 있고 어머니가 통곡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께서는 그 순간 나를 위해서 기도하셨다고 한다.
그 기도가 자살로 유혹하는 사탄에게서 나를 놓임받게 했던 것이다.
평소 어머니의 새벽기도가 없었으면 나는 아마 그때 뛰어내려 자살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 날 토요일, 나는 대전에 내려가서 산에서 결연한 심정으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최후의 수단으로 물도 안 마시고 금식했다.
하루가 지나자 기운이 빠지고 폐에서 피가 올라왔다.
기침할 힘도 없고 숨이 차올랐다.
'하나님, 제가 죽으면 하나님이 손해이십니다.
16살짜리가 새벽기도 하던 그 수많은 날들, 그 많은 밤의 철야기도를 잊으셨습니까.
목사님과 전도사, 장로님보다 더 오래 앉아서 새벽기도 했지 않습니까?'
둘째 날 밤이 되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었다.
드디어 죽게 되나 보다, 생각했지만 새벽4시 반쯤 깨어났다.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머리에서부터 시원한 얼음 같은 것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머리에서 목까지 내려오더니 '종수야 네 머리는 새 것이다.'라는 말씀이 들렸다.
시원한 기운이 목을 지나갔다.
'종수야, 네 목은 이제 새 것이다.'
계속해서 엄지발가락 끝까지 올 동안 '가슴, 배, 다리는 이제 새 것이다.'는 말씀이 차례로 들렸다.
산에서 내려오는 대로 엑스레이를 찍어봤다.
병균들은 돌덩어리가 되어 뼈 뒤에 콱 박혀 있었다.





1974년 초, 본과 3학년 겨울방학 때의 일이다.
그때 나는 아르바이트로 첫 월금 3만원을 타자 대전으로 갔다.
'어머니에게 고기를 좀 사드려야지. 삶아서 실컷 잡수시게 해야지.'
추운 방에서 떨고 계실 어머니 생각만 해도 슴이 저몄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차장 밖으로 어떤 할아버지가 눈에 띄었다.
덜덜 떠는 두 다리만 보였다.
나는 갈등이 됐다.
'하필이면 이 늦은 토요일 밤에 왜 내 눈앞에 저 주책 같은 할아버지가 서 있을까.'
나는 거금 3만원을 손에 땀이 나도록 꼭 쥐었다.
그리고 뒷걸음질 쳐서 할아버지가 사라질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차장은 어서 내리라고 성화였다.
결국 할아버지 앞에 서니 너무 불쌍했다.
추운 겨울에 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얇은 옷을 입고 덜덜 떨고 있었다.
꼭 쥐고 있는 3만원 모두를 손에 쥐어 주면서
"할아버지 맛있는 것 사 잡수시고 바지도 사 입으세요."
하고 뒤돌아섰다.
집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마치 허공을 밟는 듯했다.
정육점을 지나갈 때는 가슴이 저몄다.
'공연히 돈을 다 주었구나.
남겨서 어머니에게 한 근만이라도 사다드릴 걸...'
하는 후회도 했다.
별 생각을 다하는 동안에 집 앞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속도 모르고 반가워하셨다.
그날 밤 나는 방에서 울었다.




대학 재학시절 나의 하루 일과는 새벽기도로 시작됐다.
오후 5시 반쯤 학교에서 돌아오면 7시까지 저녁식사를 하고, 7시부터 9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9시부터 12시까지 잠을 잤다.
밤 12시에 일어나서 냉수마찰을 하고 하나님께 기도드린 다음,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시간에 신구약 한장씩을 읽고 과목마다
'제가 이 해부학이 나의 머리의 지식이 되기 전에,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기 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유익과 번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쓰이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새벽 5시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새벽기도에 갔다.
처음엔 낙제만 면하자고 공부했는데 1975년 2월, 하나님은 나에게 수석졸업이라는 큰 선물을 주셨다.
이것이 신문에도 실렸고, 다른 대학 대학교의 수석졸업생들과 함께 발정의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청와대에 다녀오기도 했다.




1975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면서, 영등포 시립병원에 파견나가 있던 11월 말경이었다.
바깥에서 시끌시끌 하는 소리가 들려서 내다보니 웬 할아버지가 덜덜 떨고 서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와 인연이 참 많다.
가까이 가서 보니 할아버지 허버직에 큰 종기가 나서 곪아터지고 엉망이었다.
수납원은 돈을 안 가져오면 치료할 수 없다면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나라는 돈이 없으면 죽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병원 문 앞에서 돈이 없어서 돌아가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을 때였다.
그때 나는 월급에서 3만원 정도를 용돈으로 쓰고 나머지는 모두 어머니에게 보내드렸기 때문에 여윳돈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수납에 가서 여직원에게 내 월급에서 떼도록 하고 그 할아버지를 내가 치료해 드리겠다고 했다.
나는 할아버지를 응급실에 모셔 와서 상처를 깨끗이 치료하고 항생제 주사도 놓아드렸다.
그리고 내 주머니에 있던 돈 3만원을 손에 쥐어드렸다.
전 날 탄 월급 중 용돈으로 3만원을 떼어둔 것이었는데, 모두 드리고 말았다.
"할아버지 이 돈으로 맛있는 거 사 드세요.
그리고 예수 믿으세요."
할아버지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 거리셨다.
고마움을 말로 다 할 수 없다는 표정이셨다.
"할아버지, 가세요. 모레 한 번 더 오셔서 주사 맞고 치료 받으세요. 그리고 꼭 잘 챙겨 드세요."
내가 미시간 대학 간증 때 필름처럼 지나갔던 장면 중에 이 할아버지의 모습도 있었다.
이분도 예수님이셨던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첫 번재 인턴 월급을 받아 어머니께 드렸을 때였다.
"종수야, 이것은 첫 열매이니 먼저 하나님께 드리자.
우리가 여태껏 고생했는데 한 달만 더 고생하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나의 첫 월급을 몽땅 봉투째 하나님께 바치셨다.
나는 어머니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했다.
1976년 3월 의사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했을 때는 삼일제약에서 커다락 트로피와 상금 10만원을 보내줬다.
그때도 역시 어머니께 드렸다.
"종수야, 상금 타본 일 없지?
이것도 첫 열매이니 하나님께 먼저 드리자."



어느날 포드회사의 중역인 제임스 커스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진찰해 보니 임파선암이었습니다.
보호자들과도 '제임스는 이제 가망이 없으니까 편안하게 마지막을 보내게 하자.'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이야기를 하고 막 나오려는데, 내 머리속에서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이 사람에게 다시 전도해 볼까.'
그러나 '전도하다가 문제가 되면 어떻게 하나' 라고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이 병원은 기독교 병원도 아닙니다.
예수님 증거하다가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다섯 번 이상이나 전도했습니다만 안 받아들이는데 왜 또 제가 해야 합니까.'
'피 .. 내가 네 손에서 피를 찾으리라.'
'오늘 네가 다시 제임스에게 예수를 증거하지 않으면 네 손에서 예수의 피를 찾으리라.'
제임스가 "왜 나에게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았소.
왜 나를 영원히 죽였고.
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지 않았소?"
하고 물으면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하는데...
반면 제가 만일 제임스에게 복음을 증거하다가 일자리를 잃거나 의사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하늘나라에 가서는 예수님을 향해서 막 뛰어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 저 기억하시지요.
제가 일자리를 잃어가면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순교란 이런 것도 되겠지.
의사 그만두라면 그만두지.
죽으면 죽으리라.'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혈을 받아들이라고 간절히 말씀을 전했습니다.
제임스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닥터 원, 맞아요.
내 마음은 답답했고 안타까웠어요.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어요.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 구주로 영접하기를 원합니다."
통증이 오는 것을 참으면서 제임스는 내 손을 잡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뇌까지 전이된 암 때문에 말도 어눌했습니다.
그 순간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가족들에 대한 걱정 근심이 그의 얼굴에서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닥터 원, 땡큐 땡큐.
닥터 원이 아니었다면 저는 예수님을 영영 몰랐을 겁니다."
그의 부인과 자녀들도 저를 붙들고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했습니다.
"당신은 나보다 먼저 가겠지만, 나도 곧 따라갈 것입니다.
그때 나를 보면 기뻐하겠습니까?"
그랬더니 제임스의 말이 물론 당신을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면서 얼굴에 평화로운 웃음을 띠었습니다.
"굿바이."
하고 돌아서는데, 마지막 숨을 크게 쉬고는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나의 조그마한 순종이 하나님께서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시던 제임스의 영혼을 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법칙이 나의 조그마한 삶을 통하여 그에게 전해졌다면 하나님 아버지, 내가 직장을 잃어도 감사하겠나이다."
그 자리에 있던 인턴, 레지던트, 간호사, 보호자 한 사람이라도 병원에 고발했더라면 저는 일자리를 잃었을 터인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임스의 가족들도 모두 예수 믿기로 했습니다.